마흔
이제 낼 모레 마흔입니다. 스무살 그 시절도 나고,
지금도 나고, 별로 변한 것은 없는 것 같은데...
그 스무살에서 대충 스무살을 더 살았습니다.
아직도 술먹으면 "젊은 놈이... 뭘 못하겠냐?"합니다.
어르신들 입장에선 새파란 젊은 놈이지만
스무살 청춘들이 보기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젊음의 탄생
젊음의 탄생은 분명 대학 새내기들을 위한 책입니다.
젊게 살고 싶어서, 젊어 지고 싶어서 책을 들었습니다.
책 제목 바로 뒷장 정 중앙에 써있는 글입니다.
젊음은 나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만드는 것이다.
이 작은 책을 오늘의 젊음을 위해 바친다.
이어령
예전에 TV 프로그램에서 디지털 기기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선생을 본적이 있습니다.
책을 통해서 만나기는 이번이 처음이지요.
선생은 정말 생각으로 젊음을 만드는 젊은이 같습니다.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대가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일단 정보가 많습니다.
흡사 재미있는 잡학사전 같다는 느낌도 듭니다.
새로운 생각을 많이 하게 합니다.
저자의 매직카드는 한두번쯤 봤을 것들인데, 아주 다양한 측면에서 개념을 설명합니다.
우리 것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동서고금의 지식을 망라하는 수 많은 사례 중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을 토대로 사례를 듭니다.
칠십이 훨씬 넘은 나이에 젊은이들에게 젊게 살라는 메시지를 젊은이의 눈높이로 전할 수 있는
선생의 정신, 지식, 삶이 참 부럽습니다.
해동공자
내 아들이 대학갈 때쯤 꼭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욕심같아서는 고등학교 갈 때 읽고 감명을 받았으면 합니다.
대학 가장 위대한 책중 하나인 대학에는 '머물 데를 알아야 정함이 있고, 정한 뒤에야 고요해 지고, 고요한 뒤에야 편안해지고, 편안해져야 사려할 수 있고, 사려를 해야 능히 얻는다.'라는 문장이 있다. 그렇다. 모든 처세, 성공학, 자기개발 책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2,500년전 동양의 선철들은 깨달았다. 모든 것은 머물 자리가 있고 그 자리에 있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즉 모든 사물의 理에 머물러야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다. 소설 남한산성의 핵심문장이다. 그 한 문장이 소설 남한산성의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 임금은 경복궁에 있어야 하는데, 임금은 서울에 있어야 하는데, 남한산성에 있다. 그 모순된 상황에서의 치욕을 남한산성은 그리고 있다. 머물 곳이 없으니 고요할 수 없고, 고요할 수 없으니 편안할 수 없고, 편안할 수 없으니 생각할 수 없다. 생각할 수 없으니 얻을 수 없다.
모순, 냉소 모든 상황이 모순되서 그런지 모든 문장과 말이 다 모순이고 냉소다. 소설의 첫 문장부터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지금 서울을 버려야 살 수 있고, 살 수 있어야 서울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결국 왕은 서울로 돌아왔다. 주전과 주화의 주장들은 모순을 더욱 깊게 한다.
주전파는 말한다. - 죽음에도 아름다운 자리가 있을진대, 하필 적의 아가리 속이겠나이까?
주화파는 말한다. - 살기 위해서는 가지 못할 길이 없고, 적의 하가리 속에서도 삶의 길은 있을 것이옵니다.
강한 자(칸)는 말한다.
- 또 너희가 나를 도적이며 오랑케라고 부른다는데, 네가 한 고을의 임금으로서 비단옷을 걸치고 기와지붕 밑에 앉아서 도적을 잡지 않는 까닭을 듣고자 한다.
- 말을 접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
- 너는 그 돌구멍 속에 한 세상을 차려서 누리기를 원하느냐. 너의 백성은 내가 기른다 해도, 거기서 너의 세상이 차려지겠느냐.(칸은 조선국왕을 너라고 칭하기를 문서작성관에게 명령한다.)
약한 자는 말한다.
-칸이 여러가지를 묻더구나... 나는 살고자 한다. 그것이 나의 뜻이다.
-소방의 군신들이 들불처럼 휘몰아오는 황군의 위무를 차마 영접하지 못하고 우선 몸을 피해 산성으로 들어왔으나 어찌 감히 대국에 맞서려는 뜻이 있겠나이까.
-황제의 깃발 아래 만물이 소생하고 스스로 자라서 아름다워지는 것일진대, 황제의 품에 들고자...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고, 강한 자는 강한자의 길로, 약한 자는 약한자의 길로 갔다. 그리고 도성으로 돌아왔다. 치욕의 한계와 삶의 한계, 강함의 한계와 약함의 한계를 내내 생각하게 하는 유쾌하지 않으나 울림이 있는 그런 경험이었다. 별 셋
그해 겨울, 47일 동안 성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칼의 노래>, <현의 노래>의 작가 김훈이 3년 만에 발표한 신작 장편소설. 병자호란 당시, 길이 끊겨 남한산성에 갇힌 무기력한 인조 앞에서 벌어진 주전파와 주화파의 다툼, 그리고 꺼져가는 조국의 운명 앞에서 고통 받는 민초들의 삶이 소설의 씨줄과 날줄을 이루어, 치욕스런 역사를 보여준다. 1636년 병자년 겨울. 청의 대군은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진격
정사임당, 격물치지, 해동공자 우리집 식구들의 별명을 만들게 된 책입니다. '격물치지'의 개념이 너무 좋아, 평생 삶의 지표로 삼고자 하여, 유림 6권 중, 제일 먼저 격물치지편을 보게되었습니다. 최인호 선생이 각 권마다 부제를 붙였는데... 5권의 부제가 격물치지이고, 주로 율곡 이이의 이야기입니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는 신사임당이고, 율곡이이를 중국에서 해동의 공자, 해동공자로고 했답니다. 그래서, 감히 우리 별명들을 정씨인 아내를 고려해서 정사임당, 공자님같은 사람되라고 아들을 해동공자로, 저는 그대로 격물치지라고 했습니다.
선비정신 지난해 부터 선비정신에 푹 빠져있습니다. 우리 선비들이 고루하고, 현실감각없고, 양반전에 나오는 퇴물 양반들 같은 사람들로 알았는데. 왕도정치를 실현하겠다는 대망을 가지고, 노력하고 풍류와 호연지기를 알던 대장부들입니다.
퇴계와 율곡 우리나라 사상가 2명을 꼽으라면 두명 다 또는 적어도 둘 중에 한명은 꼭 뽑히는 대사상가들입니다. 그들이 동시대에 살았고, 그들이 만났습니다. 2박 3일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스승으로 제자로 서로가 인정하고 도움을 줍니다. 최인호는 이런 표현을 합니다.
인류가 낳은 대성인이자 대사상가였던 공자와 노자의 만남이 세기적인 대사건이라면 철인이자 우리나라가 낳은 대사상가인 퇴계와 율곡의 만남 역시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대사건인 것이다.
호연지기 한때 불교에 심취했던 율곡은 이런 시를 짓습니다.
마음을 비우면 만사가 하나이고 기가 웅대하면 우주도 좁도다.
우주가 좁다... 스무살 나이에 이런 호연지기를 어떻게 가질 수 있었을까? 9번 장원급제를 해서 구도장원이라는 별명이 있었고, 23세에 과거시험 답안(천도책)이 조선시대 최대의 명문장으로 꼽히는 천재 율곡에겐 그 천재성만큼 큰 호연지기가 있었습니다.
역사적인 만남
율곡이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理)를 터득할 수 있겠습니다. (理는 쉽게 진리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퇴계가 대답합니다. "그대가 어떻게 이를 깨칠 수 있느냐고 물었으니, 내가 대답하겠소. 그것은 바로 주일무적(主一無適)인 것이오." (주일무적은 마음이 한가지 일에 집중하여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율곡이 묻습니다. "마음이 주일무적하려면 몸은 어떻게 가져야 합니까?" 퇴계가 대답합니다. "마음이 주일무적하기 위해서는 오직 몸이 경(敬)에 머무르고 있어야 하오"
격물치지
'사물이나 현상 속에 내재하고 있는 이치를 탐구하여 나의 지식을 완전히 이룬다'는 뜻의 '격물치지'에서 '격물'은 '사물에 나아간다'는 뜻이고, '치지'는 '앎을 완성한다'는 뜻인데,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주자는 '격물'에 이르기 위해서는 '거경(居敬)'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치지'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궁리(窮理)를 하여야 한다고 한다.
사물의 이치를 하나하나 철저히 궁구하여 그 극처에 다다르게 되면 궁극적으로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이 천하의 이치와 활연관통(豁然貫通)하게 됨으로써 그렇게 되면 내가 본래 가지고 있는 심지를 밝힐 수 있고, 그 작용에 의해 정심을 이룰 수 있다.
어느 책이 퇴계와 율곡의 만남을 이보다 더 실감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어느 책이 격물치지와 거경궁리를 이보다 더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사부님께서 대학 8조목으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 순서는 불변의 진리입니까?"
"그 순서가 옳은 길이라고 옛 선현들이 말씀하셨느니라."
"자신의 몸을 갈고 닦은 사람만이 가정을 이룰 수 있고, 가정을 잘 건사한 사람만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천하를 평화롭게 한다는 것이 얼른 이해가 안 됩니다.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너의 뜻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스승은 답을 주지 않고 이방원의 학습 진도를 확인하기 위하여 되물었다.
"자신의 마음을 바루어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려도 평천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침없이 속내를 풀어놨다. 단순한 성격 그대로다.
"고얀 놈 같으니라고, 걷지도 못하는 놈이 뛰어도 된다고 생각하려 드느냐?"
스승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노기 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다. 가정을 잘 건사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나라를 다스리려 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학문과 스승을 모독하는 처사로 여겨졌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유학의 4서 5경 중 <대학>에 나오는 말이다. 8조목으로 되어있어 <대학> 8조목이라고 부른다. <대학>은 이 8조목을 해설한 책이다.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아 이기심성학으로 발전하였고, 북송시대 주돈이가 태극도설을 가미한 것을 남송시대 주희가 완성한 해설은 다음과 같다.
이방원은 스승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당돌하기도 했지만 잘못을 스스로 뉘우치는 것도 빨랐다. 스승은 순서와 질서를 가볍게 여기는 이방원의 생각이 발칙하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가르쳐 주었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잊었느냐? 사물을 궁구하여 그 앎을 투철히 하고 몸과 마음을 바로이 하여 나라를 다스릴 때 그 앎을 자신과 가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 흐르는 정신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절목의 으뜸은 수신이며 여기에서 말하는 평천하(平天下)는 덕을 나누어 주는 것을 의미하느니라."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방원이 바닥에 코가 닿도록 넙죽 절하며 주억거렸다. 책을 펼쳐놓고 공부하던 방원이 아스라이 보이는 송악산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만 작심한 듯 스승에게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한 사람이 마음을 갈고 닦아 가정을 이루고 성의 정심으로 깨우친 몸과 마음으로 앎을 베풀기 위하여 치국에 나서도 평천하를 열지 못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요? 한 사람이 만 사람을 평하게 하는 것은 환상일까요?"
혼란한 시대의 정곡을 찌르는 이방원의 물음에 스승은 놀랐다. 자신을 포함한 이 시대의 어른들에게 질타의 목소리로 들려왔다. 이인임을 비롯한 이색, 정몽주, 길재, 이숭인 등 당대의 석학들의 무능력이 문제냐? 학설이 잘못된 것이냐? 추궁하는 목소리로 들려왔다.
이즈음,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고려 왕조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상황이었다. 공민왕이 총애하던 익비와 신하 홍륜이 사통하여 임신하고, 그 사실을 밀고하여 임금의 총애를 받으려는 신하가 있는가 하면, 그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최만생을 죽이려다 오히려 자신이 되치기 당하여 침전에서 살해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패망으로 가는 왕조말의 징후다.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요승 신돈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도성에 파다했다. 신돈의 시녀 반야가 낳았으니 틀림없다는 카더라성 소문이다. 훗날 공민왕이 반야에게 홀려 신돈의 집을 잠행하여 낳은 아들이라고 밝혀졌지만 소문의 속성상 추측에 억측을 더해 빠르게 퍼져 나갔다. 도성의 민심이 흉흉했다.
장본인 우왕은 황음에 빠져 백성을 돌보지 않고 있었다. 나라를 바로 잡아야 할 권신은 세력다툼에 혈안이 되어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었다. 권문세족과 사찰은 토지를 장악하고 백성들을 착취하였다. 춥고 배고픈 백성들은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토해냈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었다.
"오호, 너의 학문이 여기까지 왔느냐? 기특하구나."
충격을 애써 감추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스승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주체할 수 없는 무력감에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직 약관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논하는 제자가 대견스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어제의 벗이 오늘 적이 되고, 권력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중상모략과 암투가 난무하는 혼란의 시대를 꿰뚫어 보고 있는 이방원의 예리함에 소름이 끼쳤다. 제자가 아니라 한 마리 호랑이를 키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과거급제하고 색시 얻은 이방원
천성에서 묻어나는 날카로움이 두려웠을까? 훗날 이방원이 태종으로 등극하여 스승 원천석에게 벼슬을 내렸으나 원주에 은거하며 응하지 않았다. 임금이 직접 치악산 깊은 산골짜기까지 찾아가 뵙기를 청했으나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고려조에 불충한 사무친 원한과 제자를 제대로 길러내지 못한 회한 때문이었으리라.
이방원은 이렇게 공부하여 1382년 치러진 진사시에 응시하여 2등으로 합격하고, 내친걸음에 문과에 도전하여 7등으로 합격하였다. 이때 같이 합격한 동방(同榜)이 김한로, 심효생, 이래, 성부, 윤규, 윤사수, 박습, 현맹인 등이었다. 과거급제하던 해에 장가도 들었으니 경사가 겹친 것이다.
수석으로 합격한 김한로는 훗날 이방원의 맏아들 양녕대군의 장인이 되었으며, 2등으로 합격한 심효생은 강씨의 소생 세자 방석의 장인이 되었다가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래는 이방원의 맏아들이자 세자였던 양녕대군의 스승이 되었다. 박습은 태종시절 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까지 올랐으나, 세종의 장인 심온 사건에 연루되어 이방원에 의해 처형되었다.
고향 선산 송당 마을에 와서 대학 공부를 할 때, 대학의 참뜻인 '격물치지(格物致知 :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그 참뜻을 깨닫는다는 뜻)'를 알 무렵 선생을 가르치던 신당 정붕 선생이 찾아왔다.
신당 "그동안 만 번은 읽었지?" 송당 : "모레면 끝날 듯합니다."
신당 : "지난 가을, 내가 저 냉산(*)을 가리키며 저 산 바깥에 무엇이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자네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지 않았는가? 이제 그만큼 공부를 했으니 짐작이 있을 것이니 다시 한 번 대답해보게. 저 산 밖에는 무엇이 있겠나?" 송당 : "산 밖에 다시 산이 있을 것입니다."
신당 선생이 크게 칭찬하고 손을 잡으며, "자네 글 읽은 공을 내가 알겠네"하고 말하였다.
정순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장도, 김형찬 고려대 교수(유가철학), 최연식 연세대 교수(한국정치사상)도 그를 꼽았다. 경북 봉화의 유학자 권헌조(80)씨도 학문 높은 선비를 묻자 “서울에 사는 용전 선생의 학문이 높다”고 말했다. 서울 남가좌동 명지대 사거리에서 비좁은 골목길로 접어들면 김철희(金喆熙·93) 옹이 사는 소박한 단층집이 있다. 일흔 넘은 아들 내외와 함께 산다. “요즘은 근력이 떨어져서 잘 일어나질 못해.” 그는 앉은 채로 두 팔을 이용해 움직이면서 이불을 펴놓은 자신의 좁은 방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앉은뱅이 선비책상에는 초서(草書)로 휘갈긴 문집(文集)의 복사물이 수십 장 놓여있었다. 누군가 조상 문집의 탈초(脫草·초서를 정자로 바꾸는 일)를 부탁했다고 한다.
요즘도 후학들이 많이 찾아오나요? 10명쯤 되나요? 얼마나 자주 오나요? 와서 무엇을 하나요? 하는 질문에 그는 “많이 찾아와.” “10명도 넘어.” “일주일에 빈 날이 없어.” “글 묻는 게 일이지” 하고 단문(短文)으로 답했다. 그는 3시간 넘은 인터뷰 시간 중 절반 이상은 대답 대신 자신의 문집을 읽었다. ‘천해정문고(天海亭文稿)’라는 제목을 단 문집은 그가 일흔 살 될 무렵인 1983년 후배·제자들이 한문으로 쓴 그의 글을 모아 간행한 것이다. 한문으로 빽빽이 적힌 580쪽짜리 문집은 한글로 번역하면 단행본 예닐곱 권은 될 것 같았다.
―호 ‘용전’은 어떤 뜻입니까?
“용 룡(龍), 밭 전(田)이야. ‘현룡재전’(見龍在田)에서 따왔지. 농사 지어먹고 살았으니까. 주역(周易)에 나와.” (‘주역’ 첫 대목에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보는 것이 이롭다(見龍在田, 利見大人)’는 구절이 있다. 신성수 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아직 혼자의 역량으로 솔선해 나갈 수 없는 상태이니, 자신을 이끌어줄 대인을 만나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젊은 시절엔 어디 사셨습니까?
“안동 녹전면 서삼동에서 농사를 지었어. 여가(餘暇)에 글을 읽었어. 안동 본향에서는 진성 이씨가 대성(大姓)이지. 그 다음 순천 김씨, 광산 김씨 두 씨족이 많이 살지.”
―언제부터 그곳에서 사셨습니까?
“10대째야.”
순천 김씨인 그의 선조는 10여 대째 안동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고향을 왜 떠나셨나요?
“여기 다 있어.” 그는 대답 대신 문집의 한 대목을 읽었다. “나라가 없을 때 태어나 앞길이 막히는 때가 많았다. 입이 있으니 먹는 일을 폐할 수 없고, 몸뚱이가 있으니 옷을 물리칠 수 없었다”는 구절이다.
광복 직후 대전을 거쳐 50여 년 전 서울에 올라온 그는 평생 국사편찬위원회와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한문을 번역하는 일을 했다. 그의 손을 거쳐 ‘각사등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등 조선시대 공문서와 ‘성호사설’ ‘삼봉집’ ‘계곡만필’ 등 문집들이 번역됐다. 1993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초서해독능력을 가진 인재가 사라질 것을 우려해 만든 연수과정에서 초서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초서독해의 1인자로 평가된다. “국편(국사편찬위원회)이고, 민추(민족문화추진회)고 내가 만든 거야.” 그는 두 기관에 큰 기여를 했다는 자부심을 이렇게 표현했다.
―글은 누구에게 배우셨습니까?
“방란(芳蘭·김병익)이라 호를 한 5촌 숙부인데, 보통 선비는 넘으셨지. 큰 선비였어.” 그는 18세 때까지 숙부에게 배운 뒤 “영남의 거유(巨儒)인 성재(省齋) 권상익(權相翊)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다.
―어떤 책을 주로 읽으셨나요? “사서삼경(四書三經)이지. 칠서(七書)라고도 하지. 선비라면 칠서는 다 읽어야지.”
―칠서를 읽는 순서가 있습니까. “순서야 대중없지.”
―칠서 중에도 어떤 책이 중요합니까. “학용(學庸·‘대학’과 ‘중용’)이지. 학(學)은 배워야 한다는 것, 용(庸)은 떳떳해야 한다는 것이야. 거기서 벗어난 것은 없어. 특이한 게 없어.”
―요즘도 책을 읽으십니까. “계초명(鷄初鳴·닭이 처음으로 울 때)이면 독서하는 것이지.”
―칠서를 열 번 이상은 읽으셨겠네요. “열 번도 안 읽고 그걸 어떻게 외우나?”
―칠서를 전부 외우세요? “전부 외우지 않고 선비라 할 수 있나. 외워야 써먹는 것이지.”
―어떤 사람이라야 선비라고 할 수 있습니까.
“넉넉할 섬(贍), 갖출 비(備). 그게 선비야.” 선비는 ‘섬’이 아니라 ‘선’이라고 다시 물었지만 그는 “그렇게 써. 한자로는 선비 사(士)지만”이라고 말했다.
대학 한두번 읽고 격물치지라는 말이 너무 좋아서, 블로그도 닉네임도 격물치지로 했다. 대학은 정말 몇번이고 볼 생각은 있지만 아직 어떤 문장을 명확히 설명하기도 힘든 수준인데...
“돈뿐 아니지. 여러 가지가 넉넉해야지.” 그는 문집을 다시 펼쳐 읽었다. 고향친구인 고(故) 이가원(李家源) 전 연세대 교수에게 보낸 한문편지였다. “망담피단, 미시기장(罔談彼短, 靡恃己長·다른 사람의 단점을 말하지 말고, 나의 장점을 믿지 말라)’이란 말은 천자문(千字文)에 나오는 구절이라 어린 아이도 아는 말이지만,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 큰 덕은 마치 덕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大德不德)”는 내용이다.
―그런 선비가 요즘 같은 험난한 시대를 헤쳐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는 문집 속에 있는 ‘생존경쟁론(生存競爭論)’이란 글로 대신했다. “생존이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다. 경쟁이란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행위다. 사람이든 국가든 그 개개에게는 스스로 생존할 도리가 있다. 생존하려는 도리가 순수하고 정당하다면 무엇 때문에 남과 경쟁해야 하는가. (남을 이겨야 하는) ‘승인(勝人)’이 아니라 (자신을 이기는) ‘극기(克己)’의 교육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큰절을 하고 돌아서 나오는 기자에게 한 권밖에 남지 않았다는 문집을 건넸다. “가서 참조하라”고 했다. “지금 제자들이 이 문집 이후 쓴 글을 모아 문집 한 권을 더 만들고 있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