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얼마나 설레는 단어인가? 청춘만큼 예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있는가? 청춘은 인생의 정점이고, 인생의 전성기인가?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鼓動)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 은 거선(巨船)의 기관(汽罐)과 같이 힘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動力)은 바로 이것이다. 이성(理性)은 투명(透明)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智慧)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더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 얼음에 싸인 만물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청춘인가? 이제 만 36년을 더 산 나는 청춘인가? 청춘은 나이인가? 나이는 숫자인가? 밥 대신 막걸리나 한잔하려고 막걸리 안주 사려고 나서다 든 생각이다. 아이는 잔병으로 아프고... 갖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돈도 시간도 충분치 않고, 내일 할 일은 태산이고...
주변에서는 아직도 꿈이 있어 좋겠다는 사람도 있고, 아직도 꿈을 먹고 사냐는 빈정거림도 있다.
청춘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고,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져도... 청춘은 또 설레임이고 아쉬움이리라. 어린 시절의 청춘은 앞으로 누릴 미지의 세상에 대한 설레임이라면, 지금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그 시절이 청춘이다.
청춘 노래 그야마로 청춘 시절에 듣던 산울림의 청춘, 이은하의 청춘 다 어떤 노래 못지 않게 슬프다.
"날 두고 간 님은 용서하겠지만 날 버리고 가는 세월이야~~"
"슬픈노래 한 곡 들려주오~~ 청춘은 길기도 한데..."
생이 유한하지 않다면 서글픈 첫사랑도, 날 버린 내 님도, 지난 시절에 대한 향수도, 삶에 대한 회한도... 없을 것이다. 청춘은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고 다시 못 오기 때문에 그리운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어려서부터 독서를 통해 천재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의 자서전에 '격물치지'와 일맥상통하는 문장이 있어 소개해 본다.
사색하는 일에 있어 내가 조금이라도 이룩한 것이 있다면, 내가 이 토론회를 통해 정신적 습관을 얻었거나 크게 강화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정신적 습관이란,
여러가지 난점들을 반쯤 해결해 놓고 완전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 것, 즉 수수께께처럼 모르면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몇 번이고간에 이해할 때까지 되풀이하는 것,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고 해서 희미한 구석을 음미해 보지도 않고 내버려 두지는 말 것, 그리고 전체를 다 이해할 때까지는 그 어떤 부분도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말 것.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사부님께서 대학 8조목으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 순서는 불변의 진리입니까?"
"그 순서가 옳은 길이라고 옛 선현들이 말씀하셨느니라."
"자신의 몸을 갈고 닦은 사람만이 가정을 이룰 수 있고, 가정을 잘 건사한 사람만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천하를 평화롭게 한다는 것이 얼른 이해가 안 됩니다.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너의 뜻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스승은 답을 주지 않고 이방원의 학습 진도를 확인하기 위하여 되물었다.
"자신의 마음을 바루어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려도 평천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침없이 속내를 풀어놨다. 단순한 성격 그대로다.
"고얀 놈 같으니라고, 걷지도 못하는 놈이 뛰어도 된다고 생각하려 드느냐?"
스승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노기 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다. 가정을 잘 건사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나라를 다스리려 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학문과 스승을 모독하는 처사로 여겨졌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유학의 4서 5경 중 <대학>에 나오는 말이다. 8조목으로 되어있어 <대학> 8조목이라고 부른다. <대학>은 이 8조목을 해설한 책이다.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아 이기심성학으로 발전하였고, 북송시대 주돈이가 태극도설을 가미한 것을 남송시대 주희가 완성한 해설은 다음과 같다.
이방원은 스승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당돌하기도 했지만 잘못을 스스로 뉘우치는 것도 빨랐다. 스승은 순서와 질서를 가볍게 여기는 이방원의 생각이 발칙하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가르쳐 주었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잊었느냐? 사물을 궁구하여 그 앎을 투철히 하고 몸과 마음을 바로이 하여 나라를 다스릴 때 그 앎을 자신과 가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 흐르는 정신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절목의 으뜸은 수신이며 여기에서 말하는 평천하(平天下)는 덕을 나누어 주는 것을 의미하느니라."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방원이 바닥에 코가 닿도록 넙죽 절하며 주억거렸다. 책을 펼쳐놓고 공부하던 방원이 아스라이 보이는 송악산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만 작심한 듯 스승에게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한 사람이 마음을 갈고 닦아 가정을 이루고 성의 정심으로 깨우친 몸과 마음으로 앎을 베풀기 위하여 치국에 나서도 평천하를 열지 못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요? 한 사람이 만 사람을 평하게 하는 것은 환상일까요?"
혼란한 시대의 정곡을 찌르는 이방원의 물음에 스승은 놀랐다. 자신을 포함한 이 시대의 어른들에게 질타의 목소리로 들려왔다. 이인임을 비롯한 이색, 정몽주, 길재, 이숭인 등 당대의 석학들의 무능력이 문제냐? 학설이 잘못된 것이냐? 추궁하는 목소리로 들려왔다.
이즈음,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고려 왕조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상황이었다. 공민왕이 총애하던 익비와 신하 홍륜이 사통하여 임신하고, 그 사실을 밀고하여 임금의 총애를 받으려는 신하가 있는가 하면, 그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최만생을 죽이려다 오히려 자신이 되치기 당하여 침전에서 살해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패망으로 가는 왕조말의 징후다.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요승 신돈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도성에 파다했다. 신돈의 시녀 반야가 낳았으니 틀림없다는 카더라성 소문이다. 훗날 공민왕이 반야에게 홀려 신돈의 집을 잠행하여 낳은 아들이라고 밝혀졌지만 소문의 속성상 추측에 억측을 더해 빠르게 퍼져 나갔다. 도성의 민심이 흉흉했다.
장본인 우왕은 황음에 빠져 백성을 돌보지 않고 있었다. 나라를 바로 잡아야 할 권신은 세력다툼에 혈안이 되어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었다. 권문세족과 사찰은 토지를 장악하고 백성들을 착취하였다. 춥고 배고픈 백성들은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토해냈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었다.
"오호, 너의 학문이 여기까지 왔느냐? 기특하구나."
충격을 애써 감추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스승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주체할 수 없는 무력감에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직 약관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논하는 제자가 대견스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어제의 벗이 오늘 적이 되고, 권력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중상모략과 암투가 난무하는 혼란의 시대를 꿰뚫어 보고 있는 이방원의 예리함에 소름이 끼쳤다. 제자가 아니라 한 마리 호랑이를 키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과거급제하고 색시 얻은 이방원
천성에서 묻어나는 날카로움이 두려웠을까? 훗날 이방원이 태종으로 등극하여 스승 원천석에게 벼슬을 내렸으나 원주에 은거하며 응하지 않았다. 임금이 직접 치악산 깊은 산골짜기까지 찾아가 뵙기를 청했으나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고려조에 불충한 사무친 원한과 제자를 제대로 길러내지 못한 회한 때문이었으리라.
이방원은 이렇게 공부하여 1382년 치러진 진사시에 응시하여 2등으로 합격하고, 내친걸음에 문과에 도전하여 7등으로 합격하였다. 이때 같이 합격한 동방(同榜)이 김한로, 심효생, 이래, 성부, 윤규, 윤사수, 박습, 현맹인 등이었다. 과거급제하던 해에 장가도 들었으니 경사가 겹친 것이다.
수석으로 합격한 김한로는 훗날 이방원의 맏아들 양녕대군의 장인이 되었으며, 2등으로 합격한 심효생은 강씨의 소생 세자 방석의 장인이 되었다가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래는 이방원의 맏아들이자 세자였던 양녕대군의 스승이 되었다. 박습은 태종시절 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까지 올랐으나, 세종의 장인 심온 사건에 연루되어 이방원에 의해 처형되었다.
고향 선산 송당 마을에 와서 대학 공부를 할 때, 대학의 참뜻인 '격물치지(格物致知 :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그 참뜻을 깨닫는다는 뜻)'를 알 무렵 선생을 가르치던 신당 정붕 선생이 찾아왔다.
신당 "그동안 만 번은 읽었지?" 송당 : "모레면 끝날 듯합니다."
신당 : "지난 가을, 내가 저 냉산(*)을 가리키며 저 산 바깥에 무엇이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자네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지 않았는가? 이제 그만큼 공부를 했으니 짐작이 있을 것이니 다시 한 번 대답해보게. 저 산 밖에는 무엇이 있겠나?" 송당 : "산 밖에 다시 산이 있을 것입니다."
신당 선생이 크게 칭찬하고 손을 잡으며, "자네 글 읽은 공을 내가 알겠네"하고 말하였다.
정순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장도, 김형찬 고려대 교수(유가철학), 최연식 연세대 교수(한국정치사상)도 그를 꼽았다. 경북 봉화의 유학자 권헌조(80)씨도 학문 높은 선비를 묻자 “서울에 사는 용전 선생의 학문이 높다”고 말했다. 서울 남가좌동 명지대 사거리에서 비좁은 골목길로 접어들면 김철희(金喆熙·93) 옹이 사는 소박한 단층집이 있다. 일흔 넘은 아들 내외와 함께 산다. “요즘은 근력이 떨어져서 잘 일어나질 못해.” 그는 앉은 채로 두 팔을 이용해 움직이면서 이불을 펴놓은 자신의 좁은 방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앉은뱅이 선비책상에는 초서(草書)로 휘갈긴 문집(文集)의 복사물이 수십 장 놓여있었다. 누군가 조상 문집의 탈초(脫草·초서를 정자로 바꾸는 일)를 부탁했다고 한다.
요즘도 후학들이 많이 찾아오나요? 10명쯤 되나요? 얼마나 자주 오나요? 와서 무엇을 하나요? 하는 질문에 그는 “많이 찾아와.” “10명도 넘어.” “일주일에 빈 날이 없어.” “글 묻는 게 일이지” 하고 단문(短文)으로 답했다. 그는 3시간 넘은 인터뷰 시간 중 절반 이상은 대답 대신 자신의 문집을 읽었다. ‘천해정문고(天海亭文稿)’라는 제목을 단 문집은 그가 일흔 살 될 무렵인 1983년 후배·제자들이 한문으로 쓴 그의 글을 모아 간행한 것이다. 한문으로 빽빽이 적힌 580쪽짜리 문집은 한글로 번역하면 단행본 예닐곱 권은 될 것 같았다.
―호 ‘용전’은 어떤 뜻입니까?
“용 룡(龍), 밭 전(田)이야. ‘현룡재전’(見龍在田)에서 따왔지. 농사 지어먹고 살았으니까. 주역(周易)에 나와.” (‘주역’ 첫 대목에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보는 것이 이롭다(見龍在田, 利見大人)’는 구절이 있다. 신성수 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아직 혼자의 역량으로 솔선해 나갈 수 없는 상태이니, 자신을 이끌어줄 대인을 만나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젊은 시절엔 어디 사셨습니까?
“안동 녹전면 서삼동에서 농사를 지었어. 여가(餘暇)에 글을 읽었어. 안동 본향에서는 진성 이씨가 대성(大姓)이지. 그 다음 순천 김씨, 광산 김씨 두 씨족이 많이 살지.”
―언제부터 그곳에서 사셨습니까?
“10대째야.”
순천 김씨인 그의 선조는 10여 대째 안동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고향을 왜 떠나셨나요?
“여기 다 있어.” 그는 대답 대신 문집의 한 대목을 읽었다. “나라가 없을 때 태어나 앞길이 막히는 때가 많았다. 입이 있으니 먹는 일을 폐할 수 없고, 몸뚱이가 있으니 옷을 물리칠 수 없었다”는 구절이다.
광복 직후 대전을 거쳐 50여 년 전 서울에 올라온 그는 평생 국사편찬위원회와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한문을 번역하는 일을 했다. 그의 손을 거쳐 ‘각사등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등 조선시대 공문서와 ‘성호사설’ ‘삼봉집’ ‘계곡만필’ 등 문집들이 번역됐다. 1993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초서해독능력을 가진 인재가 사라질 것을 우려해 만든 연수과정에서 초서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초서독해의 1인자로 평가된다. “국편(국사편찬위원회)이고, 민추(민족문화추진회)고 내가 만든 거야.” 그는 두 기관에 큰 기여를 했다는 자부심을 이렇게 표현했다.
―글은 누구에게 배우셨습니까?
“방란(芳蘭·김병익)이라 호를 한 5촌 숙부인데, 보통 선비는 넘으셨지. 큰 선비였어.” 그는 18세 때까지 숙부에게 배운 뒤 “영남의 거유(巨儒)인 성재(省齋) 권상익(權相翊)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다.
―어떤 책을 주로 읽으셨나요? “사서삼경(四書三經)이지. 칠서(七書)라고도 하지. 선비라면 칠서는 다 읽어야지.”
―칠서를 읽는 순서가 있습니까. “순서야 대중없지.”
―칠서 중에도 어떤 책이 중요합니까. “학용(學庸·‘대학’과 ‘중용’)이지. 학(學)은 배워야 한다는 것, 용(庸)은 떳떳해야 한다는 것이야. 거기서 벗어난 것은 없어. 특이한 게 없어.”
―요즘도 책을 읽으십니까. “계초명(鷄初鳴·닭이 처음으로 울 때)이면 독서하는 것이지.”
―칠서를 열 번 이상은 읽으셨겠네요. “열 번도 안 읽고 그걸 어떻게 외우나?”
―칠서를 전부 외우세요? “전부 외우지 않고 선비라 할 수 있나. 외워야 써먹는 것이지.”
―어떤 사람이라야 선비라고 할 수 있습니까.
“넉넉할 섬(贍), 갖출 비(備). 그게 선비야.” 선비는 ‘섬’이 아니라 ‘선’이라고 다시 물었지만 그는 “그렇게 써. 한자로는 선비 사(士)지만”이라고 말했다.
대학 한두번 읽고 격물치지라는 말이 너무 좋아서, 블로그도 닉네임도 격물치지로 했다. 대학은 정말 몇번이고 볼 생각은 있지만 아직 어떤 문장을 명확히 설명하기도 힘든 수준인데...
“돈뿐 아니지. 여러 가지가 넉넉해야지.” 그는 문집을 다시 펼쳐 읽었다. 고향친구인 고(故) 이가원(李家源) 전 연세대 교수에게 보낸 한문편지였다. “망담피단, 미시기장(罔談彼短, 靡恃己長·다른 사람의 단점을 말하지 말고, 나의 장점을 믿지 말라)’이란 말은 천자문(千字文)에 나오는 구절이라 어린 아이도 아는 말이지만,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 큰 덕은 마치 덕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大德不德)”는 내용이다.
―그런 선비가 요즘 같은 험난한 시대를 헤쳐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는 문집 속에 있는 ‘생존경쟁론(生存競爭論)’이란 글로 대신했다. “생존이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다. 경쟁이란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행위다. 사람이든 국가든 그 개개에게는 스스로 생존할 도리가 있다. 생존하려는 도리가 순수하고 정당하다면 무엇 때문에 남과 경쟁해야 하는가. (남을 이겨야 하는) ‘승인(勝人)’이 아니라 (자신을 이기는) ‘극기(克己)’의 교육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큰절을 하고 돌아서 나오는 기자에게 한 권밖에 남지 않았다는 문집을 건넸다. “가서 참조하라”고 했다. “지금 제자들이 이 문집 이후 쓴 글을 모아 문집 한 권을 더 만들고 있다” 했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쓴 로렌스에 따르면, 세잔은 "40년간의 악착같은 투쟁 끝에 마침내 어떤 사과를 알 수 있었고, 한두 개의 꽃병을 완전히 알 수 있었다" - 설득의 논리학 중
세잔과 같은 화가가 40년간의 투쟁끝에 어떤 사과, 한두 개의 꽃병을 알았다니... 그런 그의 자세가 그의 정신이 그를 '근대회화의 아버지'로 만든 것을 아닐까? 무언가를 끝까지 파고들어 완전함 앎에 이르는 것, 그것이 진리탐구의 길이다. 그 진리가 우리 인생을 자유롭게 하고, 우리 인생을 의미있게 하는 것 같다.
세잔의 인생은 그야말로 격물치지의 인생이었던 것 같다.
세잔 [1839.1.19~1906.10.22]
요약
프랑스의 화가. 인상파작업을 했으나 구도와 형상을 단순화한 거친 터치로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때의 작풍이 더욱 발전하여 후에 야수파와 입체파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근대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동기가 되었다. 자연을 단순화된 기본적인 형체로 집약하여 화면에 새로 구축해 나가는 자세로 일관했다. 20세기 회화의 참다운 발견자로 칭송되고 있으며, 입체파(cubisme)는 세잔 예술의 직접적인 전개라고 볼 수 있다.
동서양의 학문의 목표를 격물, 치지로 나누어 살펴본 관점이 재미있습니다. 일단 저는 격물치지에 대해서 격물치지를 해 볼 생각입니다.
20세기가 낳은 저명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는 약 50년 전인 1950년대 초에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진 일이 있다. “백 년 후의 역사가들에게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그는 스스로 대답하기를 “그들은 아마도 서구문명이 주변 세계에 부과한 충격을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천년 후의 역사가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그들은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했는데, 그 대답으로 매우 의외의 사실을 말하고 있다. 즉 천 년 후의 역사가들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서구문명의 희생자들이 침략자들에게 부과한 놀랄 만한 충격’을 말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서구문명에 대해 이러한 새 충격을 가할 가장 유력한 비서구 문명의 후보자로 인도 문명과 동아시아 문명을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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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인비의 이러한 직관이 어느 정도 적중할는지 우리가 지금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다. 그러나 토인비가 이것을 말했던 50년 전에 비해 지금은 아마 그의 의견에 동조할 사람들이 크게 늘어날 것이다. 20세기를 풍미하던 서구문명은 점차 그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고, 그 어떤 형태이던 대안 문명이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점차 널리 퍼지고 있다. 그리고 그 대안의 하나로 동아시아가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어떤 점이 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동아시아 문명의 뿌리가 되는 깊은 학문 전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 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학문을 숭상했으며, 그 학문의 수행은 기본적으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목표로 이루어져 왔다. 이는 곧 ‘사물을 투철하게 살핌으로써 바른 앎에 이른다‘는 것인데,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현대 과학의 학문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동아시아 문명은 과학을 자생적으로 창출하는 데 실패했고 오히려 격물치지를 명시적으로 외치지 않던 서구에서 과학을 이루어내었다. 그렇다고 하여 서구문명이 격물치지에 도달했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은 격물(格物)은 했을지 모르나 치지(致知)에 이르지는 못했다. 여기서 ’치지‘라 함은 바른 삶의 길에까지 이르는 앎을 의미하는 것인데, 서구의 과학은 사실 자체의 이해와 이 지식의 활용에는 능했지만 이 앎을 삶의 바른 길을 찾는 데까지 활용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오늘의 이 위기를 초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격물치지를 그토록 외쳐온 동아시아에서는 어째서 이에 이르지 못했는가? 그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치지’라고 하는 목표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바른 ‘격물’을 해내지 못한 데 있는 듯하다. 바른 격물을 위해서는 ‘돌이 하나 떨어진다’고 하는 것과 같은 하찮은 현상에 대한 이해부터 철저히 해야 할 것인데, 그들은 이런 것이 치지에 직접 연결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깊이 추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오로지 치지에 이르기만을 애쓰다보니 결국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치지에는 이르지 못하고 공허한 논의만 무성하게 내놓는 결과에 이르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격물의 과정은 서구과학문명이 사실상 모범적으로 해내었다. 그러나 그들은 치지에 이르지 못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들이 해낸 격물을 바탕으로 치지에 이르는 작업을 해내는 일이다. 이들은 부분적인 앎의 집합은 만들었지만 이를 전체적인 앎으로 끌어올리지는 못했다. 수많은 전문 지식인은 길러내었지만 이를 한 눈으로 내다볼 통찰력 있는 지식인을 길러내지는 못했다. 욕구 충족을 위해 자신의 앎을 활용하는 기능인은 양성해 내었지만 자신의 앎을 통해 삶의 바른 길을 이끌어 내는 참된 선비는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부분적인 앎의 집합을 전체적인 앎으로 끌어올리는 일이며, 전문 지식만이 아닌 전체 지식을 한 눈으로 내다볼 통찰력을 길러내는 일이며, 오로지 욕구 충족을 위해 앎을 활용하는 기능인이 아니라 자신의 앎을 통해 삶의 바른 길을 이끌어내는 참된 선비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이는 서구문명을 단순히 추종하거나 또는 배격함으로서 되는 일이 아니라 이들이 해낸 격물을 우선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계승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치지에 이르는 새로운 작업을 수행해야 되는 것이다.
이 일은 학자들에게만 맡겨둘 일이 아니다. 학자들 또한 이러한 새로운 작업에 힘써야 하겠지만 이를 해낼 수 있는 학자들을 양성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올바른 격물의 교육과 함께 치지의 교육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오랜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계 문명의 흐름 속에 뜻있는 기여를 해오지 못했다. 우리는 격물치지라고 하는 바른 학문의 길, 바른 교육의 길을 일찍이 파악하고 있었으면서도 이를 실천에 옮겨 바른 학문적 기여를 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서구가 해낸 격물에 힘입어 우리가 이를 해낼 수 있게 되었으며, 인류문명의 흐름이 또한 이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천 년 후의 역사가들이 이야기할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 있다면 이것은 바로 제대로 된 격물치지의 교육을 통해서 빚어질 것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재용 전무가 그릴 삼성의 미래다.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25층 이 전무의 집무실. 이곳에는 격물치지(格物致知)가 세로로, 삼고초려(三顧草廬) 편액이 가로로 걸려 있다.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격물치지를 종축으로, 인재를 중시하는 삼고초려를 횡축으로 한 삼성의 기술과 인재 중시 경영을 표방한 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