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의 학문의 목표를 격물, 치지로 나누어 살펴본 관점이 재미있습니다. 일단 저는 격물치지에 대해서 격물치지를 해 볼 생각입니다.
20세기가 낳은 저명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는 약 50년 전인 1950년대 초에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진 일이 있다. “백 년 후의 역사가들에게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그는 스스로 대답하기를 “그들은 아마도 서구문명이 주변 세계에 부과한 충격을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천년 후의 역사가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그들은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했는데, 그 대답으로 매우 의외의 사실을 말하고 있다. 즉 천 년 후의 역사가들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서구문명의 희생자들이 침략자들에게 부과한 놀랄 만한 충격’을 말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서구문명에 대해 이러한 새 충격을 가할 가장 유력한 비서구 문명의 후보자로 인도 문명과 동아시아 문명을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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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인비의 이러한 직관이 어느 정도 적중할는지 우리가 지금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다. 그러나 토인비가 이것을 말했던 50년 전에 비해 지금은 아마 그의 의견에 동조할 사람들이 크게 늘어날 것이다. 20세기를 풍미하던 서구문명은 점차 그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고, 그 어떤 형태이던 대안 문명이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점차 널리 퍼지고 있다. 그리고 그 대안의 하나로 동아시아가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어떤 점이 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동아시아 문명의 뿌리가 되는 깊은 학문 전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 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학문을 숭상했으며, 그 학문의 수행은 기본적으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목표로 이루어져 왔다. 이는 곧 ‘사물을 투철하게 살핌으로써 바른 앎에 이른다‘는 것인데,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현대 과학의 학문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동아시아 문명은 과학을 자생적으로 창출하는 데 실패했고 오히려 격물치지를 명시적으로 외치지 않던 서구에서 과학을 이루어내었다. 그렇다고 하여 서구문명이 격물치지에 도달했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은 격물(格物)은 했을지 모르나 치지(致知)에 이르지는 못했다. 여기서 ’치지‘라 함은 바른 삶의 길에까지 이르는 앎을 의미하는 것인데, 서구의 과학은 사실 자체의 이해와 이 지식의 활용에는 능했지만 이 앎을 삶의 바른 길을 찾는 데까지 활용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오늘의 이 위기를 초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격물치지를 그토록 외쳐온 동아시아에서는 어째서 이에 이르지 못했는가? 그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치지’라고 하는 목표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바른 ‘격물’을 해내지 못한 데 있는 듯하다. 바른 격물을 위해서는 ‘돌이 하나 떨어진다’고 하는 것과 같은 하찮은 현상에 대한 이해부터 철저히 해야 할 것인데, 그들은 이런 것이 치지에 직접 연결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깊이 추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오로지 치지에 이르기만을 애쓰다보니 결국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치지에는 이르지 못하고 공허한 논의만 무성하게 내놓는 결과에 이르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격물의 과정은 서구과학문명이 사실상 모범적으로 해내었다. 그러나 그들은 치지에 이르지 못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들이 해낸 격물을 바탕으로 치지에 이르는 작업을 해내는 일이다. 이들은 부분적인 앎의 집합은 만들었지만 이를 전체적인 앎으로 끌어올리지는 못했다. 수많은 전문 지식인은 길러내었지만 이를 한 눈으로 내다볼 통찰력 있는 지식인을 길러내지는 못했다. 욕구 충족을 위해 자신의 앎을 활용하는 기능인은 양성해 내었지만 자신의 앎을 통해 삶의 바른 길을 이끌어 내는 참된 선비는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부분적인 앎의 집합을 전체적인 앎으로 끌어올리는 일이며, 전문 지식만이 아닌 전체 지식을 한 눈으로 내다볼 통찰력을 길러내는 일이며, 오로지 욕구 충족을 위해 앎을 활용하는 기능인이 아니라 자신의 앎을 통해 삶의 바른 길을 이끌어내는 참된 선비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이는 서구문명을 단순히 추종하거나 또는 배격함으로서 되는 일이 아니라 이들이 해낸 격물을 우선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계승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치지에 이르는 새로운 작업을 수행해야 되는 것이다.
이 일은 학자들에게만 맡겨둘 일이 아니다. 학자들 또한 이러한 새로운 작업에 힘써야 하겠지만 이를 해낼 수 있는 학자들을 양성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올바른 격물의 교육과 함께 치지의 교육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오랜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계 문명의 흐름 속에 뜻있는 기여를 해오지 못했다. 우리는 격물치지라고 하는 바른 학문의 길, 바른 교육의 길을 일찍이 파악하고 있었으면서도 이를 실천에 옮겨 바른 학문적 기여를 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서구가 해낸 격물에 힘입어 우리가 이를 해낼 수 있게 되었으며, 인류문명의 흐름이 또한 이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천 년 후의 역사가들이 이야기할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 있다면 이것은 바로 제대로 된 격물치지의 교육을 통해서 빚어질 것이다.







